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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를 일단의 행위의 해석체, 또 인식의 수용체로 이해하고 조직해 본 하나의 삶의 기계 같은 작업이다. 프로그램은 도시적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이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편입은 물론 다분히 지적 생산을 끊임없이 해내야 하는 단 둘 뿐인 주거의 구성원에 온전히 집약된다. 자연히 안온의 정서나 쓰임새 위주의 보편적 삶의 행위 보다는 두 사람 각기의 사유, 발상, 작업이란 좁은 채널에 초점을 둔 공간적 엔진, 또 그 컴팩트한 유형에 대한 탐구가 된 셈이다.


결국 이 집이 갖는 공간의 언어들과 그 서사는 단순한 거주 행위로부터 사색, 응시, 자극, 도출, 발상, 도피, 변화, 따위의, 작업과 생산의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싸이클에 은밀히 그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상부 두 개 층 로프트(LOFT) 타입의 단면 전 영역에 걸쳐 별다른 구획 없이 트인 시선의 다양한 흐름은 공간적 서사의 한 조역이기도 하다.
이 작업에서도 앞서 서문에서 밝힌 바 있는 ‘형이상학적 공동(空洞)’ 몇 개가 흔적 기관처럼, 폐 우물처럼 그리 뚜렷치 않은 존재감으로 도사리게 된다. 외기에 노출되어 숨통처럼 박힌 채 사선으로 기울어져 오르는 계단, 각 층의 진입 브리지, 진입부와 주거의 측면을 따라 얕게 포진한 반사 못(reflecting pool), 상층부의 겹 벽 등이 이 메타 할로우의 경계를 이루는 영역이다. 또 부식된 외피 동판의 표면은 이 작업이 시간에 대해 사실상 중성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남는다. 사실 건축 작업은 내게 있어 최적(optimal)에 눈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선택(option)들의 여정에 가까움을 앞서 밝힌 바 있다.
이번의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닌 듯 초기에 문득 내 내면의 심상을 수시로 드나들던 이른바 개념어 중 하나가‘기로’(岐路)이다. 이어서 작업의 테마 어휘 하나를 기습적(?)으로 주조(鑄造)하며, 다이코그램 (dichogram;물론 사전에 있을 리 없다)이라 되는대로 부르기로 했다. 생각들은 운명처럼 끝없는 기로에 놓인다. 근거와 무게를 잃은 생각들을 표류시키는 대신 이를 유희로 번역해보면 어떨까 하는 대안적 접근이었다고나 할까.
대립하는, 또는 양립하는, 평행하는, 서로 섞이기 힘든, 서로 거리를 원하는, 따위의 꿈과 욕구들을 굳이 수렴시키는 대신, 역으로 이들을 끝없이 만연시켜 번져나가는 그림을 그려보는 일 또한 나름대로 흥미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보르헤스 문학의 어느 공간적 테마처럼. 예컨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사건들로 인해 도시-사회적 음모들을 힘들어 하면서도 끝없이 이들과의 공생의 틀을 꿈꾸는 사용자 두 인물, 자본적 이해와 문화적 풍요로움 사이의 경계를 더듬는 건축, 장소나 자연을 향한 천착(穿鑿)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대상의 수직성과 인지성을 필연으로 삼아야 하는 근린 생활 시설이란 진부한 프로그램의 운명, 내부적으로 공간은 팽창하려는 욕구를 억압당하고 이를 끊임없이 덜어내려는 손길에 그 윤곽의 명료함이 훼손되는 사건,

죽어서 단단한 것들의 타당성과 살아서 숨 쉬다 궁극에 산화하려는 유기물들의 또 다른 타당성, 서로 뒤엉키고 싶지 않아 몸부림치는 듯한 공적 공간의 경험과 사적 공간의 경험-이들의 불편한 공생, 제한된 개구부이나마 주변과 대화의 눈망울을 반짝이는 외관적 이미지와 한편으로 겸허와 과묵으로 다물어진 입술처럼 언뜻은 인색해진 열림 등.......
연남동 작업, 다이코그램은 이와 같은 인자들 사이의 대립으로 끝없는 기로의 기호들, 또 이들이 그려나가는 나무들로 여백을 채우며 모종의, 의미들의 짙은 숲을 꿈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