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새로 조성된 도심의 주택단지는 컨텍스트라 할 만한 것을 찾기 쉽지 않다. 판교도 비슷한 형편으로 간혹 경사지거나 모퉁이로 활용된 이형의 필지가 있지만 거의 바둑판형이다. 그 중 낮은 둔덕을 배경으로 말발굽 모양의 기하학적 형상을 한 대지는 판교에서 유일했다. 어떤 개념이나 의도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극단적인 힘을 가진 땅이었다.
원시 동굴의 주거처럼
이 집은 건축학도로서 배운 기하학에 가장 충실한 작업이었다. 주거는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건축가의 개입이 일반적인 프로세스이지만 삶의 이야기나 건축가 이전에 지적도의 도형과 위성사진만으로도 집의 형상이나 동선, 심지어 이미지마저 강제되는 특별한 느낌의 대지였다. 땅을 존중할 솔직한 기하학적 한 덩어리 외에는 어떤 것도 군더더기일 뿐, 굳이 건축가 없이도 자기표현을 넘치게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당위성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대안을 설계했고, 결국 집주인도 땅의 소리에 수긍하게 되었다. 대지는 고스란히 수직으로 솟아 삼차원으로 드러나고, 우아한 곡면을 따라 삶과 시간이 영유 된다. 형태를 만들고 내용을 짜깁기하는 방법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고, 쇼룸이 아닌 생활의 공간에 곡선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빛과 특별함은 다소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남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난제는 원통을 해결할 외장재였다. 자연스러운 곡면을 위해서 단위가 작은 자재가 사용되어야 했고, 단호히 석재를 주장했다. 판재인 석재의 물성으로 곡면을 표현하려면 얇게 세로로 시공하거나, 벽돌처럼 작은 켜쌓기 방식밖에는 없다. 시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풀리지 않는 숙제였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습작의 결론은 그 옛날 배운 점•선•면이었다. 다양한 크기와 길이의 석판으로 가로세로의 경계를 불규칙하게 넘나들어 곡선에 관한 강박관념을 완화하는 시각적인 혼란을 유도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다
이 집의 이름이 동굴집인 이유는 원형(原形)의 갈망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돌담이나 고성들이 세월과 더불어 점점 짙어지는 것은 어쩌면 장소가 원하는 바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짓던 사람도 사는 사람도 오래된 집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사람의 인적이 드물지만, 잡풀과 나비가 하늘거리는 오래된 안식의 장소처럼.